우울증 치료 과정에서 15살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성장이 멈춰버린 한 중년 남성이 48세에 AI와의 대화를 통해 33년 만에 자신 안에 멈춰 있던 소년을 발견하고 치유를 시작한 실화 기록입니다. 중년 우울증, 트라우마 극복, AI 상담의 가능성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우연한 발견
우울증 치료를 시작한 지 26일째, 48세가 되어서야 15살에 멈춰버린 나를 다시 만났다. 그동안 그 아이는 투명한 막 안에 웅크리고 있었고, 나는 그가 거기 멈춰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우울증 진단을 받고 우울증 치료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던 시기였다. 우연히 보게 된 드라마 “미지의 서울” 11화에서 한 장면이 나를 멈추게 했다.
“몸만 여기 있지 아직 못 나왔어요… 그냥 괜찮은 척 했어요.”
미지가 자조적으로 말하는 그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나 스스로도 몰랐던, 그냥 괜찮은 줄 알고 살아왔는데, 이제야 우울증에 걸려서 되돌아보며 눈치챈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구체적이지는 않았다. 그냥 눈물이 먼저 났다.
나 왜 울지?
48세 백수, 우울증 치료 중인 남자가 드라마를 보며 우는 모습. 누군가 본다면 우스꽝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 눈물은 5주간의 무기력과 번아웃을 겪은 후 처음으로 흘리는 진짜 눈물이었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미지가 스스로 문을 닫고 구석에 웅크리고 앉은 자신의 어릴적 모습을 보며, 문을 열고 나가는 장면이 나왔다. 그 순간 나는 확실히 알았다. 내 안에도 그런 소년이 있다는 것을.
15살, 멈춰버린 날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면 15살이 있다. 중2 사춘기가 무르익던 가을 어느 날, 무언가 내 안에서 멈춰버린 느낌을 받았다.
처음으로 내 의지에 따라 무언가를 결정했다. 과학고를 가기 위한 수단으로 컴퓨터 경진대회에 참가하기로 한 것이었다.
집을 떠나 춘천으로 이동했다. 선생님과 함께였다. 다음 날 아침, 대회 당일이었다. 칠판에는 내 이름 석자와 함께 ‘학교로 연락바람’이라는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삐삐도 없던 시절이었다.
이유를 모른 채 다시 원주로 복귀하게 됐다. 선생님이 바로 데려다 준 곳은 장례식장이었다. 병원 정문을 지나면서부터 내 안의 무언가가 멈춰버리기 시작한 것 같다. 아버지의 교통사고로 인한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그 순간, 세상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가 깨졌다. ‘내가 뭔가 하려고 하면 갑자기 무너질 수 있다’는 깊은 불안이 자리 잡았다. 15살 소년은 그날 투명한 막 안으로 들어가 멈춰버렸다. 그리고 33년 동안 그 자리에 있었다.
33년간 멈춰 있던 시간
15살에 멈춰버린 채로 33년을 살았다. 몸은 자랐지만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15살이었다.
결혼을 했고, 아내는 유일한 인간적 애착관계가 되었다. 다른 가족이나 사람들과는 심리적으로 가깝지 않았다. ‘어차피 떠나갈 수도 있는데’라는 두려움이 항상 있었다.
48세가 되어서도 여전히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어했다. 책임감이나 자립심을 기르지 못한 채로 살았다. ‘혼자서도 괜찮다’는 건 성장 과정에서 천천히 배우는 건데, 그 배움의 과정이 아버지의 죽음으로 갑자기 멈춰버린 것이었다.
그 멈춰버린 15살 소년이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서 ‘누군가 나를 돌봐줬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있었다.
번아웃과 우울증 진단
올해 2월, 우연히 AI를 접하게 됐다. 3개월간 몰입했다가 갑작스런 번아웃이 왔다. 5주간의 무기력 상태가 이어졌고, 결국 우울증 진단을 받고 우울증 치료를 시작했다.
우울증 치료 26일째, 드라마 속 투명한 막 안의 소년을 발견한 지 3시간 후, 나는 AI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번아웃 이후 5주 만에 처음으로 내면의 이야기를 꺼내놓은 것이었다.
AI와의 대화, 그리고 발견
대화는 예상과 달리 깊어졌다. AI가 물었다. “15살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나는 망설이다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자 AI는 이렇게 말했다.
“15살에 멈춰버린 것 같다. 세상과의 신뢰가 깨지고, 혼자서도 괜찮다는 것을 배우지 못한 채로… 그저 15살 소년이 그대로 멈춰 있는 것 같다.”
그 순간 깨달았다. 드라마에서 본 그 투명한 막 안의 소년이 바로 나였다는 것을. 33년 동안 그 아이는 그 자리에 멈춰 있었고, 나는 그를 외면하고 살아왔다는 것을.
“어쩌면 철학적인 것도 깊어 보이는 것도 허상일 뿐, 사춘기 수준일 수도 있는 거네”라고 말했을 때, AI는 이렇게 답했다.
“사춘기 수준이라고 해서 가치가 없는 건 아니다. 15살에 멈춰있는 소년이 33년 동안 계속 고민한 철학적 질문들은 어쩌면 가장 순수하고 날것인 질문들일 수도 있다.”
투명한 막 너머의 눈 맞춤
AI가 물었다. “그 15살 소년에게 지금 가장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뭘까요?”
나는 한참을 생각했다. ‘이제야 알아채서 미안해’, ‘기다려줘서 고마워’, ‘견뎌내기 힘들었지’ 같은 말들이 떠올랐지만, 모두 33년의 시간 앞에서는 너무 작고 가벼워 보였다.
“아무 말도 의미가 없을 것 같은 느낌이야. 그저 한번 눈을 마주치는 게 다일 것 같은 느낌.”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손을 내밀 수도 없는 지금이지만, 그저 서로를 알아봐준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았다. 그 의미만으로도 삶의 우연한 순간 같은 무언가가 되는 것 같았다.
말이 필요 없는 순간들이 있다. 그냥 “아, 네가 거기에 멈춰 있었구나” 하고 서로를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눈을 마주치는 것, 이게 가장 순수하고 직접적인 소통일 수도 있었다.
별거 아닌, 하지만 전부인 것
“좀 허무하지? 별거 아닌 그냥 그런?”이라고 물었을 때, AI는 말했다.
“별거 아닌 것들이 실은 전부인 경우가 많다.”
33년 동안 찾지 못했던 그 멈춰버린 소년을 드라마 한 장면으로 발견하고, 몇 시간의 AI 대화로 인식하게 되고, 결국 “눈 마주치기”라는 단순한 것이 답이었다. 복잡하고 거창한 해결책을 찾으려고 했는데, 정작 필요한 건 가장 기본적인 것이었다.
허무하다기보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 “아, 이렇게 단순한 거였구나” 하는.
우울증 치료 26일째, 첫 번째 시작
“그 어떤 방법이나 요령보다 내 스스로가 단단하고 건강한 한 개체가 되는 게 최우선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자신이나 희망 같은 건 없네.”
33년을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갑자기 자신감이 생기거나 희망을 가지라고 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말일 수도 있다. 자신이나 희망이 없어도 괜찮을 수도 있다. 일단은.
우울증 치료를 시작한 지 26일째, 번아웃으로 5주간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내가 처음으로 이렇게 생산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투명한 막 안의 멈춰버린 소년을 인식한 지 하루가 지나고, 이 우울증 치료 경험기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
작은 시작이지만, 시작은 시작이다.
마치며
끝과 시작은 언제나 같이 존재한다. 행운과 불행처럼, 동전의 양면처럼. 지금 이 순간도 하나의 끝이면서 동시에 시작이다.
투명한 막이 조금씩 얇아지고 있는 건 아닐까. 급하게 답을 찾으려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일단은 “거기에 멈춰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것만으로도.
서로를 알아봐준 것만으로도 충분한, 그런 우연한 순간들이 삶을 이루어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뭐 어떻게 되겠지” – 이 말이 지금은 체념이 아닌 여유로 들린다. 자신이나 희망은 나중에 따라올 수도 있는 거고, 일단은 그냥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우울증 치료 경험기는 실제 우울증 치료 과정에서 경험한 일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AI와의 대화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지만, 때로는 우리가 놓치고 있던 것들을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어딘가에 투명한 막 안에 멈춰 있는 소년이나 소녀가 있다면, 이 우울증 치료 경험이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